이 책은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다.
한 권짜리 소설치고는 꽤 길게 쓴 책인데, 딱 4장으로 나눠져 있다.
상당히 긴 호흡으로 한 장씩 채워 나가는 그의 필력과 넘치는 재치를 읽으며,
'정말 잘 훈련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겪는 고민인 사랑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물들을 꽤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흔히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음에도,
그가 선택한 추리 소설 같은 구조는 긴장과 호기심의 끈을 거의 끝까지 놓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해피엔딩이 거의 그렇듯이 마지막의 결론은
뭔가 본질에서 살짝 빗겨나간 것처럼 처리된다.
마지막엔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것인가 하는 허무감마저도 든다.
그렇다면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남은 것은?
이 책의 첫 부분에는 이타카에 대한 그리스 시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책을 읽기 전의 사람에게 주는 당부임과 동시에,
읽고 난 사람에게 주는 전체 여정의 후기처럼 들린다.
시인은 이타카를 찾아 떠나는 길이 어렵고 힘들 것을 스스로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고결하고 숭엄한 생각과 영혼을 갖되, 결코 여정의 길을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길 위의 경험들을 통해 너는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지혜를 깨닫게 되었으니,
결국에 닿을 이타카 자체가 자신을 풍요롭게 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더 인간관계의 근본적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니 내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나는 좀 더 그녀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나는 좀 더 내 자신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것은 이런 것들이다.
이 책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과 경험에서 나온 멋진 이야기들이 정말로 많다.
‘호의 은행’이라든지, ‘프리츠와 한스의 이야기’라든지, ‘얀트의 계명’이라든지...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며 써먹고 싶지는 않다.
그것들은 아직 내 것이 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이타카를, 아니 나만의 이름을 붙일 ‘어떤 것’을 찾아가는 여정 위에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길 위에서 성장하는 중이다.
2006.02.20 00:16